8월 25일 목회칼럼 | 김만섭 담임목사 | 2024-08-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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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로 사로잡혀 온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뜻을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시고, 10배의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정한 3년이 지나 왕 앞에 섰을 때 믿음을 버리고,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었던 유다 사람들보다 또 스스로 최고의 학문과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갈대인들(바벨론, 세상)보다 얼굴이 더 좋아 보이고, 10배의 지혜와 총명이 더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왕의 명령이 내리매 지혜자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죽이려고 찾았더라(13)” 위기가 찾아옵니다. 포로로 사로잡혀 온 상황에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믿음을 지키고, 거룩한 삶을 살았는데 하나님은 왜 죽을 위기를 허락하셨을까요? 믿음으로 살면 고난도 없고, 만사형통으로 하나님이 이끄셔야 한다는 ‘기복 신앙’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믿음의 시작과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면 답은 금방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해 보세요. 십자가의 죽음처럼 우리의 육이 망하고, 무너지고, 죽어야 부활의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예수님과 함께 부활합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받는 것이 형통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되는 것이 형통입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불통이 아닌, 형통 중에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왜 이런 위기가 왔는지 설명해 주십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 때문에 번민하고, 두려워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꿈을 알려주고, 해석할 사람이 바벨론에 아무도 없습니다. “갈대아인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10), 왕께서 물으신 것은 어려운 일이라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11)”. 권력이 하늘에 닿는 것 같은 왕도, 헛된 우상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모두 한계에 부딪혀 죽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런데 세상과 달리, 하나님 나라 백성은 자기의 한계를 발견할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발동합니다. 그래서 무너지고, 망하는 사건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는 것이고, 망하고 죽어야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심지어 죽는 인간의 한계는 구속사의 과정이며, 형통한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한계는 믿음을 발동합니까? 원망과 불평을 발동합니까? 무너지는 사건이 나에게 살아나는 구속사의 사건임을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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